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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견훤대왕 역사유적지 개발사업 신중 추진 제언

백제문화권 지방정부협의회 구성에 부쳐

 

(전 향토사연구위원 이만유)서기 867년 경북 문경 땅에 왕이 태어났다.

 

고전에 밤에 찾아온 손님이라는 “야래자 설화(夜來者 說話)”에 의하면 가은읍 갈동 아차마을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 예쁜 딸이 있었는데 밤이면 이목이 수려한 자줏빛 옷을 입은 초립동이 나타나 처녀와 정을 나누다가 새벽이면 사라지고 또다시 밤이면 나타나길 무릇 수개월이나 됐다. 결국 처녀는 아이를 잉태하여 어찌하는 수 없어 부모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부모는 오늘 밤 그 사내가 오면 평상시와 똑같이 하되 몰래 바늘에 실을 꿰어 옷자락에 매어 두라 하였다. 날이 밝자 실을 따라가 보니 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 굴속에는 옆구리에 금빛 띠를 두른 큰 지렁이가 몸에 실이 감긴 채 누워있었다.

 

그 후로 초립동이 나타나지 않았고 10개월이 지난 후에 처녀는 옥동자를 출산하였으니 그 아이가 후백제 왕 견훤이다. 그 뒤 굴속에서 풍악이 울려 나왔고 그 소문을 들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마을에 피해가 심하였다. 그리하여 주민들이 굴을 그만 메워버렸다. 그런 후로 풍악소리가 사라지고 마을에는 불상사와 불운이 겹쳐 일어났다고 한다.

 

* 이와 똑같은 야래자 설화는 후백제 시원지 광주(무진주) 북촌에도 전해오고 있다.

 

* 역사는 승자의 것으로 지렁이 설화는 승자 측에서 지어낸 것으로 기껏 용이 아닌 보잘것없는 지렁이 자식밖에 안 된다며 폄하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이와 같은 설화를 지닌 채 천여 년의 긴 세월이 흘러가고 그 굴은 수풀이 우거져 사람들 기억 속에 사라졌다. 다시 말해 설화 속 굴이 어디에 어떤 형태로 있는지를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1월 18일 국회 세미나실에서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에 후백제를 포함시키기 위한 토론회가 개최됐다. 그리고 후삼국시대 후백제의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분포돼 있는 “후백제 역사문화권” 전국 7개의 시·군(문경시, 논산시, 상주시, 전주시, 완주군, 장수군, 진안군)이 2019년 8월 20일 전주시에서 첫 회의를 시작으로 몇 차례의 회의를 통해 “후백제 지방정부협의회” 구성과 업무협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일련의 이런 활동은 후백제의 역사적 가치 재조명과 백제, 신라, 가야문화권과 같이 정부의 예산지원을 받기 위하여 지자체 간 협력체계를 구축, 후백제문화권 관련 지자체의 동반 발전과 정보공유를 위함이며, 문경시는 견훤 출생지인 가은읍 지역 등 관내 견훤대왕 유적지를 역사적, 장소적 근거를 기반으로 정비하여 문경의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는 사업을 추진하고자 한다.

 

이런 대형 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되자면 협의체 구성과 국가 예산 지원 근거가 되는 관련법의 개정 추진과 관련 문화유산의 정비, 복원, 보존도 중요하지만 이 사업을 기획 추진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우리 지역 후백제 관련 문화유산에 대한 문헌 및 현지 조사와 연구를 통한 역사고증 및 장소 비정 등을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2013년 필자가 향토사연구 활동 중 아차마을을 찾게 되었고 마을 앞 느티나무 아래에서 이 마을에 세거해온 전주이씨 집안의 이상호 어르신(당시 86세)을 만나 들은 이야기로서(녹취) 해방되든 해 겨울 마을 사람들이 의논하여 매몰되어 사라진 설화 속 굴을 다시 복구하자고 하였으나 전혀 흔적이나 관련 정보가 없어 정확한 장소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옛 어른들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를 참고하여 어림짐작으로 지금의 위치에 5m 정도 땅을 판 곳이 현 금하굴이라는 것이다.

 

당시 마을에는 5개 반(10여 호)이 1일씩 교대로 작업을 했으며 본인이 당시 18세로서 직접 마을 어른들과 함께 해동이 될 때까지 굴 파기를 했으며 이렇게 불확실한 상황에서 판 굴을 모두 진짜 신라시대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잘 못 알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일부 주민들의 말과 함께 마을 뒷산에 설화 속 굴로 추정해 볼 수 있는 오래된 동굴이 지금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금하굴과 그 주변의 토지(순천김씨 종중) 소유주였던 김두희(金斗熙) 박사께서 1997년 문경시장에게 보낸 “견훤유적지 조성사업에 대한 이견”이란 글에서 “금하굴은 견훤유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금하굴은 1946년 금하굴을 발굴해서 동민의 소득을 올려보겠다고 파다가 실패한 흔적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또 전설 속 초립동이 들어간 곳이 굴이 아닌 쏘(아차마을 뒷산에 민지쏘가 있음)라고 한 마을 주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당시 이를 무시하고 인위적으로 조성된 금하굴에 안내판을 세우고 정비를 하여 홍보한다고 하니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곳이 금하굴로 잘 못 알고 있다.라는 것이다. 또한 후손들에게 거짓을 진실인 것처럼 꾸며서 알리는 것이 되므로 그럴 필요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미 문경시가 견훤왕과 관련된 향토 역사를 새롭게 재조명하고자 1996년에는 견훤의 출생과 관련된 전설 및 각종 유적에 대한 학술조사를 실시하였고, 이를 토대로 견훤유적지에 대한 성역화 사업으로 2002년 6월 숭위전을 건립하고 금하굴 주변을 일제히 정비하였다. 그리고 지난해 1월 26일 “견훤대왕 역사유적지” 개발 용역 최종보고회를 개최하고 이 보고서를 견훤대왕 역사유적지 개발 사업 추진 근거자료로 활용, 금하굴 정비와 생가 복원 등을 추진하여 관광자원화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래서 필자는 앞에서도 기술했듯이 이 사업 추진에 있어 우리 지역 견훤유적지 중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야래자(夜來者) 설화인 “견훤 출생설화”가 있는 금하굴(金霞窟)과 생가 복원 등에 대해 가능한 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 문헌 고증과 현지 등 다양한 조사를 통해 그 실체를 다시 한번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실시했다는 “학술조사 및 개발용역보고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금하굴에 대해 위 이상호 어르신의 진술과 김두희(金斗熙) 박사의 기고문이 사실이라면 문제가 크고, 생가 역시 금하굴처럼 아무 근거도 없이 소설 쓰듯 허구를 진실인 양 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정확한 학문적 연구와 역사적 고증 없이 마을 주민도 믿지 못하는 곳에 인위적으로 만든 현 금하굴도 재고되어야 하고 생가터 역시 근거 없이 추측만으로 마치 오래전부터 있었던 역사유적인 것처럼 한다면 후손들과 역사에 부끄러움이 되고 사업 완공 후 찾아오는 학생, 관광객을 기만하는 비교육적인 현장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참고 말씀을 드린다면 후삼국은 후백제·후고구려·통일신라 3국을 말하는 것이며, 후삼국 시대는 892년 견훤이 무진주(현 광주)를 점령하고 왕을 칭한 때부터 936년 고려가 한반도를 통일하기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후백제는 견훤(甄萱 867~936)이 신라 서남 해변을 방비하는 비장(裨將)으로 있다가 진성여왕 때 무진주(武珍州:光州)와 완산주(完山州:全州)를 장악하고 백제 부흥을 명분으로 완산주(전주)를 수도로 삼고 900년 후백제를 세웠다. 견훤은 상주 가은현(加恩縣) 사람으로 농민이었다가 장군이 된 아자개(阿玆蓋)의 아들이다.

 

 

전 향토사연구위원 이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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